1920년에 서울 종로에서 출생한 김창억 화가는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에서 일본인 화가 사토 구니오[佐藤九二男]로부터 미술을 배웠다. 당시 유영국, 장욱진, 이대원, 권옥연 등이 선,후배사이였으며 모두 사토 구니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이후 1938년 일본 동경제국미술대학(현 무사시노 미술대학)에 입학하여 1943년에 수학하였으며, 일본에서 활동하는 동안 평생의 반려자, 김우혜(칠보공예가)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일본에서부터 한국의 최초 어린이 잡지를 제작하는데 모든 삽화를 담당하는 등 국민의 교육에 누구보다 앞장섰으며(김우혜도 종이접기 부분을 담당), 귀국한 이후에는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하여 경주로 피난을 가서도 경주예술학교에서 제자들의 교육에 힘썼다. 한편, 경주에서 시작된 고청 윤경렬과의 인연은 이후에도 좋은 예술인과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휴전 이후에는 서울에 올라와서 1954년부터 1961년까지 경기여자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그의 열정적인 가르침과 제자에 대한 사랑으로 훌륭한 제자들을 양성했다.
6.25전쟁 이전의 그림들은 유실되었으며, 1957년 이후의 작품들을 확인할 수 있는데, 내면의 눈으로 보여지는 자연이나 사물의 형태를 찾고자 노력했다. 신인상파, 큐비즘, 간딘스키의 영감을 받았으며, 르 꼬르뷔지에와 피카소 등의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적 경향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드러낼수 없는 시대에 추상화라는 소재는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라 생각된다.